내 속의 중국 피? Miscellany

2층에 새로 들어온 세입자가 형제가 아닌데도 둘다 '남'씨라고 한다.
친구 중에도 남씨가 있다.
어머니도 남씨여서, 궁금한 김에 자료를 찾아봤다.


우리나라 성씨 중에 '남(南)' 씨의 시조는 '남민(南敏)' 으로 본명은 '김충(金忠)' 이다.
그는 서기 755년 중국 당나라 하남성 여남(汝南) 사람으로, 사신으로 일본을 다녀오다가 경북 영덕군에 표착(떠돌아 다니다가 정착)하였고, 신라에서 살기를 원했다고 한다.
신라 경덕왕은 이 사실을 당 현종에게 알리고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가 중국 여남 출신이므로 '남민(南敏)' 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으며, 영양현(英陽縣)을 식읍(食邑)으로 내렸다고 한다.
영양(英陽) 으로 이거하여 영양 남씨의 시조가 된 것이다.
남씨는 60여가지 본이 있는데, 고려말에 남민의 7세손 3형제가 각각 영양(英陽), 의령(宜寧), 고성(固城) 등에 각각 본을 세운것을 시작으로 계속 갈라져 내려온 것으로 보고 있다.
현존하는 본도 이 세가지라고.
본은 다르더라도 시조는 '남민' 에게서 갈라져 내려온 것으로 그 뿌리가 동일하다.

*식읍(食邑): 용어의 의미에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왕족·신하·공로자 등에게 일정 지역을 주는 것.

'단일민족' 이라는 특징을 내세우곤 하지만, 실상 한국은 이미 오래전 부터 여러 민족의 피가 섞이고 있었다.
다만, 표면적으로 확연히 드러나게 많이 섞이지 않았을 뿐이다.
접경지역에서 피가 섞이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흘러 들어온 외국인의 피가 섞이기도 했다.
병자호란, 임진왜란 같은 큰 전쟁이 일어나면 강간을 당한 부녀자들이 속출하면서 중국인과 일본인의 피가 섞인 자녀들이 태어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대다수의 백성은('평민' 혹은 '천민') 성씨가 없고 이름만 있었다.
그들은 소수의 양반과 중인(양반들과 평민이 결혼해서 낳은 자녀들)들은 이름에 성씨가 붙고, 족보에도 올려져 그 뿌리의 흔적이 기록되었지만, 백성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평민과 천민들은 성씨 없이 '개똥이','돌쇠','언년이' 같은 이름으로만 불리다가 죽으면 그만이었다.
조선시대 말엽에는 족보체계에 큰 혼란이 발생한다.
유교적 억압이 약해지면서 돈이 많은 평민과 천민들이 가난한 양반의 족보를 돈으로 매수해서 양반의 자손인척 신분세탁을 하거나, 혹은 자신이 시조가 되어 성씨를 만들기도 했다.
성씨가 없던 평민이나 천민들은 자기가 모시던 양반의 성씨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고, 자기가 살던 지역을 본관으로 하여 스스로 성씨의 시조가 되기도 했다.
즉, 현재의 성씨와 본관만으로 자신이 실제로 그 후손인지 확신할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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