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강박 Essay

나는 약간의 ‘기록강박증’이 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기록강박’ 이라는 표현이 있는지 웹에서 찾아봤다.
아직 정식 의학용어로는 쓰이지 않는 것 같지만, 블로그와 학술논문에서 제법 오래전부터 거론되고 있다.

뭔가 일이 발생하면 나중에 기억하거나 혹은 불완전한 기억을 더듬어 기억해내기 위해, 그리고 증명하거나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기록을 남겨두어야 마음이 편한 것을 말한다.

나는 원래 성격이 급하고 덜렁대며 잔 실수가 많고 깜빡 잊는 게 많은 성격이다.
이런 성격을 보완하기 위해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건을 사러가기 전에 무엇을 사야할 것이며, 물건을 살 때 무엇을 고려해야 하는지를 간략히 메모하는 습관을 들였다.
그런 이후 물건을 살 때의 실수가 줄어들었고, 깜빡하고 빼먹는 실수가 없어졌다.
하지만, 대체로 물건을 사거나 간단한 약속 등 에만 메모를 하는 습관일 뿐이었다.
그러다가 군대에 가서는 항상 체크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은,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군대문화 때문에, 굳이 메모를 하지 않더라도(메모를 할 도구나 여유 자체가 없는 환경에서) 잊지 말고 챙겨야 할 것들을 몇 번이고 되뇌고 눈으로 확인하고 체크하는 습관이 생겼다.
제대 후에는 그런 행동이 어느 정도 몸에 붙어서 메모하는 습관은 없어졌고, 여느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살았다.

기록강박이 생기게 된 결정적 원인은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중요한 약속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했고, 나중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에는 언제 어떻게 일이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했다.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해(혹은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노트에 일정이나 할일을 기록하는 버릇이 생겼다.
그 정도 까지만 해도 성공적인 사회생활의 기본요소 중 하나일 뿐이었겠지만, 강박적으로 기록을 하게 된 시기는 바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누군가 거짓말을 하거나 약속을 어기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할 때부터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록을 잘 남기지 않는다.
지키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거나 약속을 쉽게 어기는 사람들은 순간순간 생각나는 대로 약속을 하고는 한다.
약속날짜까지 돈을 못 받게 되거나, 약속을 지켜서 불이익을 당하거나 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기록하는 일은 중요해졌다.
기록을 해두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언제 무슨 약속을 뭐라고 했는지’ 따져 물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나에게 잘못을 덮어씌우거나 변명을 하는 것에 대해 정확한 기록을 대며 항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록을 더듬으며 분석을 해보면, 사람들이 어떤 거짓말을 어떤 식으로 했고, 상황이 어떻게 흘러갔으며, 그런 일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결과에 대해 분석할 수 있다.
분석을 통해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을 단련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누가 무슨 말을 했고, 당시에 어떤 정보들이 주변에 있었는지를 기록해두는 일은 상당히 유용하다.
기록의 중요성을 느낄수록 항시 기록을 해두어야 한다는 강박이 생기기 시작한다.
요즘도, 굳이 기록해두지 않아도 될(혹은 이해관계가 발생할 일이 없는 사사로운) 일은 기록해두고 싶은 욕구를 버리고 지나가지만, 조금이라도 중요하거나 나중에 기억해내야 할 일이다 싶은 필요성이 있다 싶은 일이나 사건들은 반드시 기록해둔다.
며칠 전에는, 2년 전에 2층 세입자와 쓴 월세계약서를 잃어버려서 언제 이사를 왔는지 날짜를 알 수 없었지만, 내가 별도로 메모해둔 기록을 찾아내서 언제 이사 왔는지 날짜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강박은 생활 전반에 영향을 끼친다.
항상 기록을 해둬야 할 것 같은 무언의 압력을 느끼게 되고, 기록을 하지 않으면 약간의 불안증세 까지 생긴다.

기록을 하는 것은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타이핑을 쳐서 파일로 메모를 남겨두거나, 사진을 찍어두기 위해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고 기록한 것에 대한 자체 분석과 생각 등을 정리 해두는 데에도 시간이 많이 소모된다.
기록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데에도 정기적으로 상당한 시간을 소모한다.
어쩌면, 기록하고 정리하는 시간에 뭔가를 더 할 수 있을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기록을 꼼꼼히 해두는 것은 분명 좋은 일이긴 하지만, 간혹 너무 집착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꼼꼼한가? 아니다, 나는 원래 게으르며 귀찮은 것을 싫어한다.
그럼에도 대체로 꼼꼼한 사람들이 가진 버릇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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