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편까지 봤던가, 그 이후로는 안봤는데, 오랜만에 보고싶어져서 5편이 나왔길래 봤다.
기시감(旣視感) 은 이미 본 느낌이라는 말로, 데자뷰(deja vu) 라는 용어가 널리 쓰인다.
이것은, 인간의 뇌가 기억을 저장하는 방식의 오류에서 비롯된다.
뇌는 모든 정보를 간략화 해서 저장하는데, 그러다보니 간략화된 정보들중 유사한 정보가 있으면 같은 정보로 착각하는 현상이다.
반대말로는 자메뷰(jamais vu) = 미시감(未視感) 이 있다.
잘 알고 있는 것을 모두 처음 본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어릴때, 이런 기시감을 많이 느꼈던것 같은데, 나이가 들면서는 별로 없었던것 같다.
이 영화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에서 사용되는 것은 기시감이 아니다.
단지, 기시감 현상이라고 묘사했다면 좀더 설득력이 있겠지만, 영화에서는 일종의 '미래 환상 체험' 을 다룬다.
즉, 실제로 몇분 후에 일어날 일을 체험하고, 환상속에서 일어났던 여러가지 증거들이 환상에서 깨어난후 똑같이 일어나면서 주인공은 악몽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위험을 알리고 피신한다.
일종의 예지몽과 같은 것으로, 미리 일어날 일을 경험하는 것인데, 예지몽은 '꿈' 이기 때문에 예지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즉, 정신이 또렷하다가 갑자기 환상을 경험하고 깨어나는 현상을 보인다.
이런 증상은 사실 영화상에서 존재한다.
그냥 '환영(幻影, Phantasm)' 을 봤다고 정의하자.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에는 이렇게 환영을 보는 사람이 한명씩 등장한다.
그들은 원래 평범한 사람인데, 영화가 시작하면서 갑자기 환영을 보는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편의 주인공 샘은 최초에 한번 환영을 보지만, 이후에는 보지 못한다.
환영을 보는 사람은 모든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매개체이기도 하면서, 결국 자기 자신도 죽음의 위협으로 부터 벗어나지는 못하는 패턴을 보였는데, 샘은 최초에 매개체로써 역할을 했지만, 더이상 다른 캐릭터들과 다를바 없는 캐릭터가 된다.
그 다음 요소는, 죽음을 회피하지만 결국 죽음의 굴레를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설정이다.
사실, 이 요소가 '파이널 데스티네이션' 시리즈의 핵심인데, 이번 5편에서도 이런 틀을 철저히 따르고 있다.
즉, 주인공이 이런저런 고난 끝에 죽음으로 부터 벗어난듯 하지만 엔딩 직전에 허무하게 죽으면서 끝을 맺는 포맷.
그런 기본틀 안에서, 등장 인물들이 어떻게 황당하게 죽어 나가는지를 묘사하는 것이 이 영화의 본질이고 스토리 메이킹 방식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결국 뻔한 스토리이고, 그 본질을 더 비틀지 않는 이상에는 단순 킬링타임용 영화라는 평가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다. 이 영화는 그냥 즐기면 되는 킬링타임용 영화다.
'재미' 라는 점에서는 그냥저냥 무난한 볼거리와 재미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 영화의 센세이션함은 이미 식상해졌기 때문에 재미가 많이 반감된다.
관객들은 스토리가 대충 어떻게 흘러갈지를 이미 예상하기 때문이다.
3,4 편을 안봐서 이 영화가 어떻게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는지는 상세히 모르겠지만, 이번 영화에서 새롭게 도입된 요소는(아마도), 누군가를 죽이면 대신 그 사람의 인생 만큼을 살게 된다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사실, 그 논리에는 근거가 없다.
등장인물들은 원래 사고로 죽었어야할 사람들인데, 우연히 살아났고, 그들이 누군가를 죽이면 죽인 사람의 인생 시간을 대신 얻을 수 있다는 논리다.
그 논리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전혀 근거가 없다.
결국, 최후에 살아남은 샘과 몰리는 프랑스로 가는 비행기를 타며 행복해질것 같았지만, 비행기 안에서 또다른 누군가가 환영을 보며 소란을 피우는 것을 무시한다.
그리고, 샘과 몰리는 처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즉, 죽을 운명인 사람은 결국 죽고마는 것이 이 시리즈의 엔딩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잠깐 죽음을 회피하긴 하지만 결국 무조건 죽는다는 것인가?
'재미' 라는 점에서 그냥저냥 볼만한 볼거리들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영화는 그냥 '사건의 나열' 처럼 진행된다.
이 시리즈가 원래 그랬듯이, 살아남은 사람들이 황당한 사건으로 하나둘씩 순서대로 죽어 나가고, 최후의 반전에서도 살아남지만, 결국 모두 죽으면서 끝난다.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죽어나가는지를 보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라 하겠는데, 일상 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물건들이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치명적인 무기가 된다.
이번 영화에서 묘사된 장면중 두가지를 짚어보자.
라식(라섹) 수술을 받으러 갔다가 의사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레이저 기계가 오작동을 해서 레이저 강도가 쎄져서 큰 상처를 입고, 심리적 안정을 위해 안고 있던 인형의 눈이 바닥에 떨어져 있다가 그것을 밟은 여자가 창 밖으로 실족한다.
안마를 받으러 갔다가 온몸에 침을 놓은 상태로 누웠는데, 우연히 불이 나는 바람에 놀라서 침대 밑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침이 몸 깊숙이 박힌다.
그리곤, 불을 피해 숨다가 돌부처에 머리가 찍혀 죽는다.
후반부에서는 식당에서 식칼이 아슬아슬 하게 떨어지는 장면도 있다.
그렇다.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던 물건들이 어느 순간 흉기로 돌변하고, 또 그것으로 인해 치명상을 입게 되는 장면들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리즈를 감상하다보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동물이며 허무하게 죽을 수 있는지 새삼 느끼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는 칼, 바늘, 각종 공구, 철조망, 물, 양초, 가스 등등이 모두 경계 대상이다.
영화를 감상하다보면, 이 영화를 19세 이하 청소년들이 보게 되면 공포증이 생길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된다.
공포증(恐怖症, phobia, 포비아)이란, 실제로 그것이 위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지만, 공포의 감정이 특정대상과 결부해서 공포감을 유발하고 행동을 저해하는 증상을 말한다.
약하면 '증상' 정도이지만, 심하게 되면 인체가 직접 반응하는 장애가 될 수 있다.
나 역시 약간의 선단공포증(先端恐怖症)이 있다.
선단공포증이란, 날카로운 물건을 두려워 하는 증상으로, 사실 어릴때 칼이나 샤프, 바늘 같은것에 찔려본 사람들은 모두 겪게 되는 증상이다.
나이가 들면서 이런 증상이 약해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나 역시 남들과 크게 다를것 없지만, 평소 위험한 것을 멀리 하려고 신경을 쓰는 때문인지 약간의 선단공포증을 느낄때가 있다.
(적면공포증이라고, 사람을 만나면 얼굴이 빨개져서 사람 만나는 것을 기피하는 증상도 있다고 한다.)
영화 스토리가 별 내용이 없다보니, 영화 외의 부수적인 이야기가 길어졌다.
대충의 줄거리는 이렇다(스포일러)----------------------
어느날 샘은 친구 및 동료들과 워크숍에 참석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공사중인 다리위에서 잠깐 멈춘다.
다리가 무너지면서 끔찍한 사고를 당하는 환영을 보게된 샘은 환영 속에서 본 여러 증거들이 똑같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불안을 느끼고, 여자친구와 함께 버스를 내려 뛰기 시작한다.
이상함을 느낀 나머지 6명의 동료도 함께 뒤따라 내려서 피신하여 8명은 목숨을 건진다.
하지만, 그날이후 8명이 차례대로 황당한 죽음을 맞게 되고, 사고 현장마다 나타나 이상한 말을 하는 커다란 흑인 검시관이 한 말을 기억한다.
다른 사람을 죽이면 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있다고.
계속 살아남았던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가운데, 죽음이 다가옴을 느낀 네이던이 우연히 회사 동료를 밀어서 죽음을 면하게 되고, 이후에 그 다음 사람이 죽게 되자, 네이던처럼 다른 사람을 죽이면 살 수 있을거라 믿게된 피터는 다른 사람을 죽이려 하지만 용기가 없어 실패하고, 샘과 몰리가 저녁식사를 하는 식당으로 찾아와 샘을 쏴 죽이려 한다.
격투 끝에 샘이 피터를 죽이고, 샘과 몰리, 그리고 네이던 세 사람은 죽음으로 부터 회피해서(몰리는 애시당초 환영에서 죽지 않았다) 다시 예전처럼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갔다고 느낀다.
인턴 요리사로 가기 위해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른 샘, 그리고 샘과 동행하게 된 몰리.
샘이 버스에서 환영을 보고 위험하다고 외쳤던것처럼, 왠 남자가 위험하다고 외치는 소리를 듣지만, '왜 저래?' 라며 무시한다.
이륙한 비행기는 한쪽 엔진에 불이나면서 몰리는 비행기 밖으로 떨어져 버리고, 샘은 불에 타 죽는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부품이 떨어져 나가서, 네이턴이 있던 바(bar)로 떨어져 네이턴은 즉사.
(네이턴이 죽인, 평소 사이가 안 좋았던 직원 로이가 뇌혈관이 막혀 몇일안에 죽을 운명이었다는 얘기를 나눈후, 네이턴이 죽은것)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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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턴은 자신이 우연히 죽이게 된 로이의 남은 생이 몇일 이었기 때문에 죽었다고 치더라도, 샘은 왜 죽었으며, 몰리는 왜 죽었을까.
굳이 논리적으로 따지면 엉키게 되지만, 그냥 흥미 위주로 보면 무난한 킬링타임용 영화.
처음 시작하자 마자 나오는 다리 무너지는 장면은 정말 리얼한데, 어떻게 찍었는지 궁금할 정도로 스케일이 크다.
체조하다가 사고로 떨어져서 허리가 부러지는 장면이라던가, 비행기 터지는 장면도 꽤 리얼해서, 볼거리는 풍성한 편인데, 좀 끔찍하다.
위에서 잠깐 언급한것처럼, 평범한 일상속의 물건이나 상황들이 치명적인 위험으로 내몰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난 이후 괜히 찜찜한 생각이 들게된다.
청소년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영화. 일상속의 물건들이 괜히 겁이 날지도 모르고 괜히 끔찍한 악몽을 꾸게 될런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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