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거짓말의 발명 (The Invention Of Lying, 2009) Movie_Review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려니 연상되는 것들이 많아 글을 작성하는 데에 시간이 꽤 오래 걸릴 것 같다.
아는 동생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보게 되었는데, 감상하기 전 들은 단편적인 줄거리만으로도 이 영화가 얼마나 참신할지 기대를 하게 되었다.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거짓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세상.
현실적으로는 이런 일이 있을 가능성은 절대 없겠지만, 영화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영화 초반부, 정말 참신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해서 마음속으로 ‘그래 이 영화를 블랙코미디계의 명작 반열에 올려야겠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거짓말(하나님이 있다)이 세상에서 큰 이슈를 불러일으키고, 주인공이 짝사랑 하는 그녀와의 로맨스에 목을 매기 시작하면서 이 영화를 ‘명작’이라고 치켜세우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또 사랑 얘기에 집착하는 거야?’ 라는 생각도 들고, ‘용두사미가 되어버렸네~’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중반부의 그런 지지부진한 흐름이 지나고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지금까지 풀어놓았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정리하며 조용하게 마무리 지어간다.
모두 감상하고 난 뒤의 평가는, ‘그래, 이만하면 사람마다 평가가 좀 다르긴 하겠지만 매우 훌륭한 블랙코미디로 꼽아줘도 되겠어!’ 라고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평론가들 쪽에서도 이 영화에 대한 평가가 나뉘었지만, 그래도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는 쪽이 우세했다고 한다.
내 스스로 영화를 보면서 초반의 엄청난 기대와 중반부의 실망, 그리고 후반부의 그럭저럭한 만족에 이르기 까지 복잡한 감정이 생겼는데,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우리에게 수많은 이슈들을 던져주는 괜찮은 영화다.
기술적인 완성도보다도,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에 집중을 해보자.
이 영화에 대해 깊이 다루려면 아무래도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

현실속의 세상에서 거짓말을 할 수 없거나 거짓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이 영화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논리적으로 하나하나 따진다면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앞뒤가 안 맞는 구석이 많다.
다른 것은 현실세계와 모두 똑같은데, 단지 ‘거짓말’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들이 산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이 세상에는 우리의 직관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많은 일들과 많은 것들이 있으니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 영화의 설정처럼 실제로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있다고 믿고 영화를 감상해보자.

영화를 찬찬히 보고 있으면 그런 독특한 설정을 왜 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간다.
단지, 흥미를 끌기 위해 그런 설정을 한건 아닌 것 같다.
그런 극단적인 설정을 통해 현재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처한 상황을 우화적으로 풍자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하 스포일러 포함------------------
이 영화에는 몇 가지의 화두가 있다.
‘미수다’의 ‘루저’ 파문으로 한국에서는 많이 익숙해진, ‘인생의 낙오자(혹은 패배자)’를 칭하는 ‘루저(loser)’가 첫 번째 화두다.
그 외에, 여자들이 잘생기고 돈 많고 멋진 남자를 선택하는 이유는, 유전적으로 우월한 2세를 낳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영화 속의 사람들에게는 종교가 없다.
이를테면, ‘거짓말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종교가 없다’는 식이다.
(‘종교는 모두 거짓말이다’라는 것을 상징한다.)
그래서 영화 속 사람들은 모두 ‘무신론자’이고, 죽으면 ‘영원한 무(無)’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어머니를 달래드리기 위해 죽으면 모두가 행복해지는 곳으로 간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의사와 간호사들의 입소문을 타고, 급기야 마크(주인공)는 마치 기독교에서 모세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낭독하듯이 친구가 주문한 피자케이스에 자신이 기록한 거짓말들이 담긴 일종의 ‘십계명’을 낭독한다.
종교인들이 보면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겠지만, 무신론자인 사람들이 보면 ‘종교는 거짓말이다’ 라는 것을 우화적으로 연출하고 있는 부분이어서 블랙코미디로써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다.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주인공 ‘마크’가 거짓말을 시작하게 된 이유는, 인생의 낙오자로써 궁지에 몰리게 되자 그의 심장에서 알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더니 즉흥적으로 거짓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굳이 빗대어 얘기하자면, 어느 날 어떤 급작스런 충격으로 인해 평범한 사람에게 초능력이라도 생긴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세상에서 혼자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남들이 할 수 없는 거짓말로 많은 일들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셈이다.
영화 전반을 아우르는 이야기는 이렇다.
‘마크’는 몇 년 간 ‘안나’를 짝사랑 하다가 지인에게 졸라 소개팅을 하게 된다.
도무지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그 세상에서, ‘안나’는 ‘마크’의 무능력함과 외모를 직설적으로 말하는데, 그에게 데이트가 별로 내키지는 않으며, 그가 키도 작고 들창코에 뚱뚱하고 무능력한 패배자라는 말을 직설적으로 말한다.


간략히 줄거리를 기록한다.
주의,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하의 줄거리를 먼저 읽으면 영화 보는 재미가 반감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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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이야기를 전담하는 작가 ‘마크’는, 그렇잖아도 별 이야깃거리 없는 14세기를 담당한데다가 글 쓰는 재주도 형편없어서 해고를 당하기에 이른다.
병든 어머니는 노인 요양소에서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태인데다가, 나이 40줄이 다 되도록 변변히 돈도 못 모아서 월세 ‘300달러’를 낼 돈도 없다.
결국, 회사에서 해고를 당하고 통장에 있는 300달러라도 찾으려 은행을 찾는데, 마침 은행 전산망이 고장이 나서 통장을 해지하지는 못하고 잔액이 얼마인지도 조회를 할 수 없다고 한다.
얼마를 찾으려고 하느냐는 은행직원의 말에 마크는 심장에서 일어난 이상한 변화에 의해 ‘800달러’를 찾겠다고 거짓말을 한다.
하지만, 그사이 전산망이 회복이 되고, 마크의 통장 잔고를 확인한 직원은 잔고가 ‘300달러’ 밖에 없다고 한다.
마크는 거짓말을 한 것이 후회되어 거짓말을 했노라고 사실을 털어놓으려 하는데, 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은행직원은 자기네 전산망에 오류가 있었던 것 같다며 ‘800달러’를 내어준다.
‘거짓말’ 이라는 것이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은행직원은 ‘마크’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마크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뭔가를 발명을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거짓말’을 발명했다는 것이 뭔가 좀 이상하지만, 아무튼 그는 자신이 ‘거짓말’ 이라는 것을 발명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거짓말’ 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세상이기에, 남들이 모르고 할 수도 없는 ‘거짓말’ 이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된 마크에게는 뭔가 대단한 것을 발명하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친구들을 만나 자신이 무언가 대단한 것을 발명했노라고 설명하는데, 친구들은 도무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가 자신이 ‘흑인’ 이라고 또는 ‘에스키모인’ 이라고 해도, 무슨 말을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의 말을 그대로 다 믿어 버리는 것이다.
‘마크’는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그 ‘무엇인가’를 알게 되었지만, 사람들은 도무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궁지에 몰려 하게 되었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 ‘거짓말’ 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마크’에게 초능력이 생긴 것과 같다.
친구들에게 자신이 발명한 그 ‘무엇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해 보인다.
‘마크’는 그가 사는 세상에서 ‘루저(패배자)’이기 때문에 여자들에게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부류의 남자인데, 길을 가던 예쁜 여자를 골라 자신과 섹스를 하지 않으면 곧 세상이 멸망한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자, 평소 같았으면 ‘마크’ 같은 남자에게는 관심도 없었을 도도한 여자가 ‘마크’와 섹스를 하기 위해 모텔로 급히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이 정도 되면, 적어도 마크가 사는 그 이상한 세상에서는 마크에게 거의 초능력에 가까운 대단한 능력이 생긴 것이라 볼 수 있다.
자신만 할 수 있는 그 ‘거짓말’로 부와 명예를 쥘 수 있게 될 거라는 확신이 선 ‘마크’.
친구와 카지노에 방문해서 도박을 하는데, 자신이 배팅한 곳이 틀리자 잠시 사람들에게 거짓말로 뭔가를 봤다며 시선을 돌린 후, 자신이 배팅한 곳의 위치를 바꿔서 도박에서 이긴다.
그리고 ‘잭팟이 터졌는데 돈이 안 나온다!’며 카지노에 항의해서 돈도 받아낸다.
그렇게 쉽게 돈을 벌게 된 ‘마크’.
자신감이 생긴 ‘마크’는, 자신에게 퇴짜를 놓았던 ‘안나’에게 다시 전화를 건다.
자신에게 부와 명예가 생기게 되었으니 이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
‘안나’는 편안하고 안락한 삶이라는 조건은 충족 되었지만, 결혼을 해서 2세를 낳으면 키 작고 들창코에 뚱뚱한 패배자의 유전자를 나눠 가지게 된 2세가 나올 것이라며 거부감을 표시한다.
데이트 도중 어머니가 계신 요양소에서 전화가 온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솔직한 의사는, 어머니가 오늘밤을 넘기시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하고, 어머니는 자신이 죽은 이후에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다. 
‘마크’는 두려워하는 어머니가 편히 돌아가실 수 있도록 거짓말을 한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한다.
‘기독교’ 식으로 말하자면 ‘천국’인 셈이다.
죽으면 간다는 그곳에서는 모두에게 대저택을 주고, 행복한 일만 있으며, 먼저 죽은 사람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한다.
아들의 말을 믿은 어머니는 행복한 마음으로 돌아가시고, ‘안나’는 어머니의 죽음으로 슬픔에 빠진 마크를 곁에서 지켜준다.

사건은 이때부터 커지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임종 때 옆에 있었던 의사와 간호사들이 ‘마크’가 어머니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려고 말한 거짓말을 들은 것이다.
그들은 ‘마크’가 남들이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다고 소문을 내기 시작했고, 그 소문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수많은 사람들과 취재진들이 그의 집 앞에 몰려온 것이다.
‘마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고민한다.
자신을 이해해줄 것만 같은 ‘안나’도 그가 설명하려는 ‘거짓말’ 이라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 하는 ‘안나’에게 ‘마크’는 어머니에게 얘기했던 거짓말을 그대로 다시 얘기하는데, ‘죽음 뒤에 행복한 곳에서 살 수 있다’는 말에 ‘안나’가 너무나 행복해 하는 것이다.
‘안나’ 역시 ‘마크’의 거짓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마크’의 말 한마디에 모든 사람들이 행복해 질 거라는 ‘안나’.
‘마크’는 ‘안나’의 충고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기로 결심하고, 밤을 세워가며 사람들에게 읽어줄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런 모양새가 마치, ‘모세가 산에서 하나님으로 부터 돌에 새겨진 십계명을 받았다’는 중동 어느 지방의 민족 신앙 설화(?)와 매우 비슷한 장면으로 묘사하고 있다.
‘마크’는 밤 세워 종이에 쓴 그 글을 그냥 들고 나가 읽기 멋쩍어서 친구가 가져온 피자박스에 종이를 붙여 낭독한다.
그 모양새 역시, 기독교 삽화에서 모세가 양손에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을 들고 있는 모양새와 닮았다.
사람들은 마크가 한 줄 한 줄 거짓말을 읽어갈 때마다 수많은 질문을 한다.
그 ‘하나님’ 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많은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어디에 사느냐? 하늘에? 우주보다 아래에?
어떤 인종이냐? 내 어머니가 암으로 죽게 만든 것도 하나님이냐?
일순간, 사람들은 그 ‘하나님’ 이라는 게 ‘개새끼’ 라고 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들에게 온갖 나쁜 짓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마크는 '당신들에게 좋은일도 했다' 라고 하자,
어떤 사람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가 치료된 것도 ‘하나님’이 한 일이고, 큰 사고가 났는데 살아남은 것도 ‘하나님’이 한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모든 일들이 일종의 시험이겠네요?’ 라고 결론을 내려 버린다.
여기까지 보면,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현실세계에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말하는 ‘하나님’ 이라는 존재에 대한 의문과 분노 등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과 풍자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아무튼, 그 일로 인해 ‘마크’는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된다.
마크의 말 한마디에 변화되기 시작한 사람들.
마크의 기대대로 모두가 행복해질 줄만 알았지만, 그런 분위기는 이내 잠잠해지고.
사람들은 마크의 말을 교회의 신도들처럼 믿기는 하지만, 뚱뚱하고 들창코에 키 작은 패배자의 모습을 한 ‘마크’의 외모를 여전히 비난하고 있다.
죽으면 행복한 곳(이른바 ‘천국’)에 가게 된다니 죽을 때까지 대충대충 살고 술이나 퍼마시겠다는 사람도 있고, 마크에 대한 관심이 시들해지더니 오히려 마크의 외모만을 가지고 낄낄거리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자신의 거짓말로 세상 사람들이 행복해질 거라는 기대가 꺾여버린 ‘마크’.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하기 이전과 같이 똑같아져 버린다.
‘마크’가 만든 엉터리 시나리오로 제작된 ‘흑사병’ 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대박을 터트리고, 그의 모든 말과 행동이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고 이슈가 되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과 별개로 사람들에게는 ‘마크’가 여전히 패배자의 외모를 가진 사람일 뿐이다.
‘안나’는 ‘마크’를 험담하고 다니던 동료 ‘브래드’와 눈이 맞는데, ‘브래드’는 외모도 완벽하고 능력 있는 멋진 남자다.
훌륭한 유전자를 갖춘 ‘브래드’를 놓치고 싶지 않은 ‘안나’.
결국, ‘안나’는 ‘브래드’와 결혼하기로 하는데, 시름에 쌓인 ‘마크’는 두문불출 집에 틀어박혀 지내다가 친구의 권유로 ‘안나’의 결혼식에 참석하게 된다.
그들의 결혼서약에서 ‘마크’는 이의를 제기한다.
비록 자신의 유전자가 ‘브래드’보다 못나고, 2세를 낳으면 자신을 닮아 뚱뚱하고 키 작고 들창코를 가진 아이를 낳게 될 것이며, 그 아이 역시 ‘루저(패배자)’가 되겠지만, 그 보다 중요한 것은 ‘안나와 만나서 행복 하다’는 것이 아니냐고 묻는다.
모든 이들은 그의 말에 수긍하지 못하지만, ‘안나’는 결국 자신의 2세에게 유전적 우월성을 줄 ‘브래드’를 포기하고 ‘마크’를 선택한다.
세월이 지나 2세가 태어나고, ‘마크’의 아들 역시 ‘마크’처럼 거짓말을 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안나’가 해온 음식이 맛있다며 거짓말을 해주는 ‘마크’와 아들.
‘그래서 그들의 삶은 행복했다…’ 라며 다소 싱겁게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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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줄거리를 그대로 다 기록했다.
이 영화를 본 대다수의 사람들이 말하듯이, 영화의 시작은 정말 참신하고 기대를 잔뜩 하게 만들었지만, 마치 인생의 목표가 오로지 ‘연애’인 것처럼 너무 로맨스에 치중하고 있고, 영화 초반부에 상당히 참신하게 느껴졌던 설정인 ‘거짓말을 못하는 세상’에 대한 설득력이 상당히 부족하게 느껴진다.
소재 자체가 ‘만약, 이렇다면…’ 이라는 설정이지만,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식이 서로 잘 들어맞지 않고 다소 억지스럽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세상의 사람들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거짓말’ 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고 그것이 무엇인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마크’라는 등장인물이 우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법을 깨우치게 되지만, 그가 하는 거짓말은 타인들에게는 모두 ‘사실’로 인지되기 때문에 ‘마크’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해서 세상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얻어낼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말 한마디로 사람을 조종하고 세상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힘을 가지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실에서도 맹목적으로 믿는 신도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그들을 이용하는 수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있다.)
하지만, ‘마크’ 라는 인물은 선천적으로 악한 사람이 아니다.
‘선한 거짓말’ 또는 ‘하얀 거짓말’.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거나 좋은 결과가 오기를 바라는 마음에 거짓말을 한다.
거짓말을 전혀 할 줄 모르고 거짓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크의 거짓말 한마디에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귀엽기까지 하다.
하지만, 마냥 귀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독설을 서슴없이 퍼붓는다.
못생겼다거나, 패배자라거나, 재수가 없다거나 하는 등 마음에 상처받을 수 있는 말들.
‘마크’ 라는 등장인물에게, 뚱뚱하고 키 작고 들창코인 ‘루저(패배자)’라고 직설적으로 말을 하는데, 그다지 매칭이 되지는 않는다.
키가 크지는 않지만 작다고 하기에는 그럭저럭 표준 키 정도는 되는 것 같고, 들창코라고 번역을 했는데 들창코로 보이지는 않는다.(번역 상 ‘의역’일 수 있다.)
코끝이 살짝 갈라져서 살이 두툼하게 붙은 모양인데, 멋있는 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들창코도 아니다.
‘들창코’는 일명 ‘돼지코’라고 해서, 위로 들려서 콧구멍이 보이는 모양의 코를 말하는 것이다.
뚱뚱하다고 하는데, 뱃살이 두툼하고 표준적인 몸매보다는 살이 찌기는 했지만, 서양인 아저씨들의 표준적인 뱃살 정도랄까?
영화 속 세상 사람들이 그의 외모를 놀리는 부분이 많은데, 그렇게 놀림감이 될 정도라는 생각이 안 들어서 감정이입이 되지 않았다.
정말 못생기고 뚱뚱하고 키 작은 배우를 캐스팅했다면 좀 더 공감이 갔을 텐데 말이다.
생각해보니 그 배역에 어울리는 좀 더 그럴싸한 배우가 있다. 
여러 종류의 기묘한 코믹 영화에 많이 출연한 ‘잭 블랙’ 이다.
‘잭 블랙’이 출연한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Shallow Hal, 2001)’라는 영화의 소재가 이 영화에서 비판하는 ‘외모지상주의’와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에 참고하면 좋다.
주인공 ‘마크 밸리슨’ 역을 연기한 ‘릭키 제바이스’의 연기가 그럭저럭 볼만하다.
인생 낙오자인 ‘마크’라는 캐릭터 때문인지 아니면 배우의 성격이나 연기스타일이 원래 그런지 모르겠지만, 시종일관 조용조용 침착하게 말하고 점잖다.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의 모습이 그렇다보니, 주인공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가는 이야기가 전체적으로 차분하고 약간은 지루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차분한 연기에 대해 언급하다보니 이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짐캐리’가 생각난다.
그는 관객의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기묘한 표정과 미치광이 같은 말투로 정신없이 떠들어대고 유머러스하다.
미국식의 전형적이고 과장된 슬랩스틱 코미디와 그 속에 블랙코미디를 적절히 섞어 재미있으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는 배우.
‘짐캐리’는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영화계에서 코미디 영화로 한 획을 그은 배우다.
‘짐캐리’의 영화중에서 명작으로 꼽을만한 영화가 꽤 많은데, 그런 ‘짐캐리’의 코미디 스타일과 ‘릭키 제바이스’의 연기를 비교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영화가 긴장감이 떨어지고 약간 느슨하고 지루하다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이유도 바로 주인공 ‘마크’를 연기한 ‘릭키 제바이스’의 연기 스타일이나 느낌, ‘카리스마’가 약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루저(패배자)’ 캐릭터인데 ‘짐캐리’가 연기한 캐릭터들처럼 너무 강렬하고 카리스마 있다면 그것도 이 영화의 느낌에 안 어울릴 수 있겠다.
그러면서도, 만약 ‘짐캐리’가 이 캐릭터를 연기했다면 뭔가 더 대단한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아니, ‘잭 블랙’이 연기했더라면 상당히 잘 어울렸을 것 같다.

영화를 보다보면 다음과 같은 기대를 하며 보게 된다.
첫째, ‘마크’가 거짓말을 발명(?) 하게 된 이후, 다른 사람들도 거짓말을 하기 시작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되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결국, ‘거짓말’은 오직 주인공 ‘마크’만 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고, ‘안나’와 결혼해서 낳은 2세가 그 능력을 물려받는다.
둘째, ‘마크’가 ‘안나’를 사랑하게 되어서, ‘마크’와 친해진 ‘안나’는 ‘마크’가 말하는 그 ‘거짓말’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되지만, 역시 그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안나’는 우수한 유전자를 가진 ‘브래드’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마크’를 선택(자유의지)하긴 했지만, 그것은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미묘한 감정’의 흔들림과 본능에 의해, 자신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 ‘마크’를 선택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영화는 ‘안나’가 유전적으로 우수한 ‘브래드’가 아니라 유전적으로 불리하고 매력이 없어보이던 ‘마크’가 결혼을 하며 ‘외모가 전부가 아니다’라는 아름다운(?) 결론을 내리며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지만, 이런 결말이 관객들에게 얼마나 설득력이 있을까?
‘마크’는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외모로나 능력으로 ‘루저(패배자)’가 맞지만 남들에게는 없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안나’가 ‘루저(패배자)’를 선택했다고 보기에도 다소 애매하다. 어쨌거나 그는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나’가 선택한 ‘마크’를 굳이 현실적으로 비교를 하여 예를 들자면, ‘아저씨 외모’에 나이도 많지만, 돈(능력)이 많은 사람이랄까?

여자는 유전적으로 우수한 2세를 낳기 위해 본능적으로(?) 유전적 형질이 우수한 남자를 선택한다는 가설이 요즘에는 좀 낡은 사고방식이기도 하고, 이 영화가 지나치게 ‘마크’와 ‘안나’의 로맨스에 집착하고 있는 것도, 이 영화의 작품성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1998년 짐캐리 출연의 영화 ‘트루먼 쇼’ 처럼, 로맨스에 그치기보다는 더 심오한 주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아쉽다.
이 영화를 보다보면 이런저런 이야깃거리가 많이 생각나기는 하는데, 로맨스 부분이 많다보니 진지한 이야깃거리는 기억에 남지 않았다.
꽤 명작이 될 뻔했으나 범작이 된 것 같다.
사색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나 영화감상을 나누는 모임에서 보면 좋을만한 그럭저럭 괜찮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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